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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8. 14. 17:22 화산귀환

* 따로따로 생각난 썰을 하나로 연결함

* 청명른이라고 쓰긴 했는데 그냥 청명이가 사랑받는 이야기

 

 

 

 청문이 정신을 겨우 추슬렀을 땐 주변에서 저를 걱정하는 사형제들과 제자들이 보였음. 다 자신보다 먼저 죽은 자들이었고, 그렇게 천마에게 어깻죽지부터 꿰뚫려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청문은 서둘러 비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화산의 가족들을 둘러봄. 저가 죽기 직전 사형제를 밀쳐내고 마화를 맞은 자부터 전쟁 초기 마교에 대해 알려지기 전에 죽은 자까지. 그리고 그 중에는, 명실상부 천하제일인이자 청자배의 막내이자 첫쨰 청명이의 모습은 없었음.

 

 저가 죽기 전까지 청명의 매화가 전장을 휩쓰는 모습을 보았으니 어쩌면 청명이는 살아남았을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에 현세를 바라보는데, 십만대산에서 살아있는 생명이라고는 천마와 청명 단 둘 뿐. 그마저도 청명이는 살아남을 수 없는 부상을 입은 채였음. 그리고 제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아 천마의 목을 치고 저도 쓰러지는 모습을 봄.

 

 비참하긴 하지만, 이제 이후의 일은 후손들에게 맡겨진 일이었음. 물론 몸사리기 바쁜 구파놈들이 화산을 챙길 리가 없었지만, 제 모든 것들을 쏟아내 중원을 구했다는 그 사실은 등선한 화산의 제자들에게 큰 자부심으로 남았음.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으로 청명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림. 제일 마지막까지 남아 제 사형제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들의 단 하나뿐인 목적을 이루어낸 막내를 칭찬해야만 했음.

 

 그리고 청명이는 올라오지 않음.

 

 처음에는 농담식으로 원시천존이 얘를 등선시켜도 될지 심사하느라 늦는다고 시시덕거렸지만, 해가 지지 않아 시간의 개념이 모호한 곳에서도 차마 짧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 흘러가자 점차 화산의 제자들은 말이 없어짐. 왜 안오지. 술상 안차려놔서 그런가. 아닌데. 청명 사형이 등선을 못하면 대체 누가 등선해서 마땅하다는거지. 하다못해 도가도 아닌 저 암존도 청명 사형이랑 오래 어울렸다고 돗자리 깔고 도사형님 기다리고 있는데.

 

 그리고 그런 기다림에 지쳐갈 때 쯤, 청진의 눈에 한 거지가 눈에 들어왔음. 비쩍 곯아서 가느다란 뼈대에 남들이 좀만 큰소리를 쳐도 겁먹고 소스라치고, 소심해서 말도 잘 못하는 통에 구걸도 시원찮게 하는 어린 거지. 청명과는 공통점이 단 하나도 없었건만, 청진은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했음. 청명사형? 그 말에 모여든 다른 제자들도 이상하게 그 거지를 보자마자 청명이 맞다고 확신을 하게 됨. 이성으로는 그럴 리 없다고 하는데, 등선하면서 본질을 보게 된 탓인지, 오늘도 빈 그릇으로 돌아와 왕초에게 두드려 맞고 한구석에 쪼그리는 그 거지는 분명 청명이 맞았음

 

 으아아악! 도사 형님! 화산(+당보)은 난리가 남. 아무리 저들을 그렇게 괴롭혔다고 하지만 청명은 분명 그들의 가족이었고, 그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제일 위험한 곳에 서슴없이 달려들었던 소중한 사형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제 모든 것을 쏟아내 천마를 베고 천하를 마교의 손에서 구해낸 둘도 없을 중원의 영웅이 빈 찐빵 하나 못먹고 같은 거지들에게도 무시당하며 벌벌 떠는 모습이 좋게 보일리가. 하지만 그보다 더한 의문은 '대체 왜 청명이 저기에 있느냐' 였음. 상황을 보니 현세는 이미 100년쯤 지나 있었고, 그들의 예상처럼 아무도 화산을 돕지 않아 그 후손들은 몰락하는 문파를 부여잡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 뒷배에 종남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도 알았지만 지금은 그 무엇보다 왜 청명이 저곳에 있는지가 더 중요했음

 

 그들이 평생 몸담았던 도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몸과 마음을 수양하고 높은 덕을 쌓은 일부의 사람들만 등선하여 선계로 가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했음. 하지만 100년이 지나 다른 몸을 얻어 다시 세상에 발을 딛는 것은 도가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을 뿐더러, 굳이 따지자면 불교의 윤회와 비슷하지만 그것과도 달랐음. 평생 저딴 것도 도사라고 한탄하고 놀려댄데다, 청명 본인도 도가 뭔지 모르는 말코로 살면서 신선놀음이나 하다가 화산에 뼈 묻고 가렵니다 하고 등선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지만 대체 그 누구보다 의와 협을 몸소 실천한 청명이 아니면 누가 등선을 할 수 있다고. 의문은 의문대로 커져만 갔지만, 지금의 그들에겐 그저 오늘도 벌벌 떨면서 잘못 맞아 부러진 팔뚝을 붙들고 끙끙대는 거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음

 

 누군가는 전생에 선업을 쌓으면 후세에 상으로 돌아온다고 하던데, 정말 길가의 개만도 못하게 얻어맞고 지내는 청명이는 전생에 지은 죄 떄문에 그런 것인가. 그 죄업 나누어 가질 터이니 제 사형 좀 편히 살게 해달라는 화산의 제자들의 부름도 무색하게, 청명의 환생 거지 초삼이는 정말 어이없는 이유로 죽고 말았음. 평소에 초삼이를 괴롭히는 맛에 살았던 거지 하나가 놀려주겠답시고 상한 만두를 주었거든. 며칠째 음식을 먹지 못한 초삼이는 그것도 모르고 한번에 그걸 삼켰고, 건강한 사람이라면 설사 몇 번 하고 말았을 것을 초삼의 몸은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앓다가 죽어버림. 그걸 지켜보는 화산은 비통해 하면서, 이번에야 말로 청명이가 올라오면 맛있는 음식이나 잔뜩 먹여주자며 벼르고 있었는데.....

 

 청명이는 이번에도 올라오지 않음.

 

 대체 왜? 하는 통에 다른 거지, 종팔이는 초삼의 몸이 차갑게 식은 것도 모르고 구걸도 안나간다며 머리를 작대기로 쳐버림. 아이고 저눔시키! 하면서 청문이 날뛰는 것도 잠시, 그 충격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초삼은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음. 그리고 화산은 깨달았음. 청명이 꺠어났다고. 청명 본인도 제가 왜 그런 모습으로 다시 돌아왔는지 의문을 가졌지만, 그보다 화산이 망했다는 말에 더 분노하여 제 귀환은 사소한 일로 취급하고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몸뚱이를 이끌고 화산으로 향함

 

 그래도 사형은 사형이네요. 여전히 화산을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으니. 그리운 사형의 모습에 다들 흐뭇해 하던 것도 잠시, 어쩌면 그들이 외면했던 화산의 현 실태를 청명은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음. 청문조차 이 이상은 후대의 일이라며 통탄하기는 했으나 개입할 수 없음에 손을 놓고 있던 것을, 얼마든지 제 몸 바쳐 화산을 들쳐 업을 수 있는 청명은 아무 망설임 없이 온갖 것에 개입하기 시작함. 처음에는 장로직을 맡았던 제자들이 옛날 일을 떠올리며 그러지 말라고 외쳤지만 청명은 당시 그들이 했던 것보다 더 능숙하게 화산의 일을 처리해감. 재경각에 흑자를 기록하고, 불타버린 비급을 다시 쓰고, 영단을 만들고, 제자들을 키워내고, 지켜내고. 그들이 살아있을 시절엔 청문과 청진과 재경각주와 의약당주가 도맡아서 했던 일들이었음. 청명은 무력이 필요할 때만 슬쩍 내려오는 정도였기에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건만, 청명은 그 장로들이 했어야 하는 일들에 모두 발을 들이며 화산을 떠받치기 시작함

 

 우리가 너무 큰 짐을 남겨버렸구나. 그렇게 비통해하던 것도 잠시. 약했던 문파가 강해지면서 생기는 온갖 문제가 발생함. 신흥 강자를 견제하는 기존의 강대 문파들, 명성을 위해 먹잇감을 찾는 사파놈들, 그리고 마교. 구파는 다시금 화산을 이용해먹을 생각을 했고 사파는 언젠가 처리해야 할 눈엣가시로 여겼으나 청명은 그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들보단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마교에 대비를 해야만 했음. 셋 중 하나정도는 옛날의 화산에겐 손쉬운 일이었으나, 셋 모두를 상대하면서 옛날만큼 강성하지도 못한 화산을 지키기 위해 청명은 몇 배나 무리를 해야 했음.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선계의 화산은 종종 청명의 혼잣말에 대답을 해주면서도 비통해 할 따름이었음

 

 청명의 무기는 단 두 가지였음.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위와 마교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점. 그걸 위해 천우맹을 만들었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서 사파까지 끌어모아 마교에 대응할 세력을 만들어 낸 청명은, 다시금 십만대산에서 천마와 일기토를 벌이고 그 목을 잘라내 전쟁을 종결시켰음.

 

 본인도 살아날 수 없는 부상을 입고서.

 

 그래도 화산을, 그리고 저를 믿고 함께 해준 다른 이들을 살렸으니 과거에 비하면 잃은게 적은 승리였음. 청명은 회광반조로 약간이나마나 돌아온 기운을 끌어내 화산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고, 감사와 사과를 전하고, 그렇게 눈을 감았음. 선계의 화산은 다사다난했던 제 사형제의 두 번쨰 삶의 끝을 지켜보며, 청명이 과연 첫 생의 모습으로 올지 두 번째 생의 모습으로 올지 기다리고 있었음

 

 그리고 청명은, 그런 화산의 기대따윈 모른다는 것처럼 선계로 오르지 않았음

 

 결국 폭발한 청문과 청진, 그리고 몇몇 화산의 제자들이 선계 중 가장 높은 산을 올랐음. 원시천존의 전각 앞에서 며칠이고 무릎을 꿇은 채 저희의 형제가 왜 화산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했고, 원시천존은 그들의 정성에 응했음. 저 아이 스스로가 원했던 것이란다.

 

 청명은, 화산신룡이자 화산검협으로의 삶을 살던 청명은 전쟁이 격렬해지며 과거와 비슷해질수록 저가 잊어버리고 있던 기억을 떠올렸음. 마지막까지 화산을 걱정하며 육신에게서 떨어져나왔던 그 순간 그리도 증오스러웠던 천마의 혼이 그 어느 순리에도 따르지 않고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고 그를 붙잡겠다고 따라 나왔던 기억이었음. 그렇게 정해진 길을 벗어나려는 그를 붙잡았던 것은 도가 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선인들이었음. 달뢰라마는 고통의 길이라며 울며 말렸고, 원시천존은 제 사형제들을 상기시켜주며 선계에 오를 것을 종용했고, 부처는 차라리 불교의 윤회에 넣어줄 터이니 그런 슬픈 길을 걷지 말라고 했음. 그러나 청명은 그 모든 말이 진실임을 알면서도 결국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고통의 삶으로 뛰어들어버림.

 

 이유는 하나였음. 청명은 그렇게 사형제들을 잃고 나서야, 어쩌면 화산에 저가 없었으면 지금보단 조금 더 많이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후회를 했기 때문이었음. 물론 그럴 리 없다는건 청명 본인이 제일 잘 알았음. 맨날 사형이 자길 괴롭힌다고 투덜투덜 하면서도 제가 다치고 오면 그 누구보다 기겁을 하며 약재를 아낌없이 뿌려대던 그들이, 할 줄 아는건 칼질밖에 없는 망나니라고 욕하면서도 저가 끝내 지키지 못한 사제의 시신을 들고 왔을 때 단 한번도 탓하지 않은 화산이 청명을 내칠 리가 없었고, 설령 청명의 상상이 사실이라 한들 아무도 그걸 뭐라 하지 않을 터였음. 하지만 한 번 물꼬를 튼 후회는 청명을 내리눌렀음. 사제들, 사질들이 검 가르쳐달라고 했을 때 조금만 더 신경써서 봐줄걸. 재경각주가 머리 싸매면서 빙궁과 거래를 트려고 할 때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말이라도 얹어볼걸. 청진이 참고하자며 청명의 의견을 물어올 때 진중하게 대답해줄걸. 청문이 네놈이 그러고도 도사냐며 벼루를 집어던질 때, 단 한 번이라도 도가에 대해 고찰해볼걸. 제 사형제들의 죽음 자체만으로 큰 충격인 것을, 천마가 부활하면 그마저 무의미했다는 사실까지 겹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청명은 기어이 자기비하를 하기 시작함.

 

 사실은, 화산에 제가 가지 않았다면, 그 곳은 좀 더 행복한 곳이 되지 않았을까.

 

 한낱 짐승도 은원을 아는 것들이 있었으니, 청명은 80년 평생을 살며 단 한 번도 화산에게 해준 것이 없었음을 한탄하며 그에 은혜를 갚기로 했음. 나 화산의 제자로서 검존이라는 칭호 하나만을 들고 검수로서 살아왔으니, 몇 번이고 화산을 해하려는 것들로부터 화산을 지키리라. 그렇게 정해진 길을 거부하고 이 땅에 내려온 충격으로, 청명은 전생을 떠올리지 못하고 약 15년을 거지 초삼이로 살다가 죽음을 다시 겪고 나서야 기억을 떠올림.

 

 그리고 두 번째로 천마의 목을 베면서, 그가 언제고 다시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달은 청명은 모든 일에 마무리를 짓고자 했음. 모든 것을 알고서 대비했음에도 겨우 동귀어진 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다음에는 천마를 이길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었음. 그래서 다시금 가야 할 길을 거부하고 환생하려는 천마의 혼을 붙들고, 청명은 지옥으로 떨어져내림.

 

 너나 나나, 어울리는 곳은 지옥 뿐일테지. 이제야 제 사형제들이 '귀신은 쟤 안잡아가고 뭐하냐' 라던가, '마귀가 친구먹고 지옥가자고 할 듯' 이라며 투덜대던 그 소원을 이뤄줄 수 있겠다며 해맑게 웃어버린 청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천마를 잡아 누르며 지옥불에 휩싸였음. 지옥의 질서를 지키던 자들이 무언가 소리치며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지만 청명은 오로지 마지막까지 천마의 영혼이 온전히 재로 화하는 그 순간을 눈에 새김.

 

 지옥불은 그 영혼이 지옥에 있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면 흔적도 없이 태워버리게 되어 있었음. 청명은, 전세와 현세를 통틀어 많은 사람을 죽이기는 했지만 철저하게 도가에서 긋는 선을 넘어가지 않았고, 원래라면 한 줌 그을음도 남기지 않았어야 했지만 문제는 청명 또한 순리를 거스른 존재였다는 것임. 청명의 영혼은 그 어디에서도 규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돌아왔기에 이미 금이 간 유리구슬같은 상태였고, 청명이 천마를 누르는 것과 같이 천마 또한 청명을 놓지 않았기에 그 영혼은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깨져버리고 말았음. 그것이 원시천존에게 화산의 제자들이 듣게 된 일의 전말이었음

 

 다시는 청명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 화산의 제자들은 절망에 빠졌음. 처음 청명이 죽고 100년간 기다린 것은 괜찮았음. 어떤 방식으로든,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원시천존의 입에서 확답이 나왔으니, 그간 참고 견뎠던 슬픔과 외로움이 결국 흘러넘쳤음. 청문은 그 조각난 영혼이라도 회수하겠다며 선산에서 뛰어내리려 했고, 청진은 그런 청문을 붙잡으면서도 끝까지 저와의 약속을 지켜준 청명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음. 그 떄, 원시천존이 청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음. 굳이 내려갈 필요는 없다. 내 그 조각 하나라도 건져오라 했으니.

 

 청명의 목에 둘러서 낑낑거리던게 일이던 담비, 백아가 어느샌가 담벼락 위에 앉아 있었음. 그 입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물려 있었고, 원시천존은 작은 비단 보자기를 꺼내 그것을 받아들었음. 손가락 마디 하나쯤 되는 유리조각에, 청명한 하늘과 한 송이 매화가 비치고 있었으니 화산의 제자들은 그것이 청명의 영혼임을 쉽게 알 수 있었음.

 

 잘못 들면 다시 깨질까 조심스레 그것을 들고 화산의 제자들이 모여있는 산으로 청문은 돌아갔음. 백아 또한 그들의 뒤를 따랐음. 그들은 이걸 어찌해야할지 감을 잡지 못했음. 대체 어찌해야 이미 부서진 혼을 되돌리고 청명이를 만날 수 있을까. 그 때, 백아가 혼을 들고서 날래게 어디론가 향했음. 눈 뜨고 청명을 도둑맞은 그들은 서둘러 그 담비를 쫒았고, 백아는 한참을 달리더니 어느 고목 앞에 서서 조각을 내려놓았음. 선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미 말라 죽은 거대한 매화 고목이었음. 청문과 제자들이 왜 이런 곳으로 왔는지 의문을 가지고 있자, 백아는 답답하다는 듯 다시 조각을 물고서 나무 밑동에 난 작은 틈새로 그 조각을 밀어넣었음. 아이고, 청명아! 놀라서 청문이 손을 뻗었지만, 조각은 손에 잡히지 않았음.

 

 그 때 사제 하나가 외침. 고목이, 살아 있는 것 같다고. 분명 다 죽어서 뚝뚝 끊어지던 가지에서 파릇한 잎이 돋아나고 있었음. 백아는 으쓱하며 배를 쭉쭉 내밀었고, 그게 마치 어린 모습으로 칭찬을 갈구하던 청명의 모습고 겹쳐서 결국 화산의 제자들은 다시 울어버림. 고목은, 살아났지만 이파리는 파릇한데 비해 매화를 피우지는 않은 채 다시 몇 년이 지났음.

 

 그 사이 화산의 제자들은 그 고목을 마치 청명이처럼 대했음. 사형. 오늘은 꼭 검술 봐주셔야 합니다. 도사형님. 작년에 담근 술이 꽤 맛이 좋소. 한 잔 두고 갈 터이니, 더 드시고 싶으면 내려 오시던가요. 청명아. 심부름 좀 시키려고 했더니, 자느라 대답도 안하더냐. 되었다. 좀 더 자고 있거라. 백아는 고목 중간에 그나마 널찍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던 어느 날, 옛날 청명이를 깨우던 때처럼 습관적으로 고목을 찾던 청문이 고목에 매화가 핀 것을 발견함. 단 한 송이였지만 분명히 만개한 그것을 보고 청명의 이름을 부르던 순간, 나뭇가지 위에 무언가가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았음. 동그란 두상. 기억보단 짧지만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 많아야 4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화산의 도복을 입은 어린아이였음. 눈동자는 청명한 하늘을 담아둔 것 처럼 투명했고, 그 안에 매화가 비치고 있었으니. 심지어 백아는 이미 그를 알고 있던 것처럼 아이의 몸을 빙빙 돌다가 다시 목덜미를 감싸안았음

 

 청명아.

 

 흠칫. 그러나 아이는, 울고 있던 청문의 부름에 깜짝 놀라더니 어디론가 쏙 숨어버림. 고목을 돌면서 아이를 찾아봐도 그림자조차 보이질 않아 저가 착각한 것인가 싶어도 한 송이 매화는 그대로였음. 서둘러 화산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하자 사형제들은 우르르 몰려가 매화나무를 둘러싸고 울면서 청명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아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음. 그야 그 영혼이 온전하지 않았으니 자신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렇게나 경계심을 드러낼 줄이야. 다들 어찌해야 할지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에 의외로 해결책을 낸 것은 당보였음. 애들 꼬시는 데에는 당과가 최고죠. 접시에 꿀이 끈적하게 떨어지는 떡과 과일을 잘라 빚은 빙편을 올린 채 고목을 찾은 당보는, 활짝 웃으며 청명의 이름을 불렀음

 

 청명아, 아해야. 당과 하나 먹지 않겠느냐.

 

 본래는 저가 연하이니 부를 리 없을 칭호였지만, 당보는 이러나 저러나 제가 존경하던 형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싱글벙글 웃으며 그를 불렀음. 그러자 청문의 말처럼, 어린 아이가 가지 뒤에 몸을 반쯤 숨기고는 고개를 슬쩍 내밀었음. 그리고는 과연 이걸 받아도 되는지 눈을 도록도록 굴리더니만 몸은 여전히 가지 위에 둔 채 손을 쭈욱 뻗어 당보가 내민 접시 위 떡을 집으려고 했음.

 

 그러다 결국 균형을 잃고 빙글 돌아 떨어지는 것을 당보가 받아들었지만.

 

 멀리서 그걸 보던 화산이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어린 청명이는 당보 무릎에 앉아서 당과나 냠냠 먹고 있었음. 당과에 정신 팔려있다가 화산의 도복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당보 뒤로 숨었는데, 왜 자신들을 피하냐는 질문에 어린 청명이는 '저들은 나를 보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슬퍼한다. 그러니까 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답함. 물론 그들은 기뻐서 운 것이었지만 4살짜리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으로는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음. 그 와중에 당보는 웃으며 다가갔고 당과까지 내밀었으니 모습을 드러낸거고. 화산은, 아이 앞에서 울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청명이를 달래기 시작했음.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음. 심지어 그 나잇대의 청명이는 온갖 사고를 다 치고 다녀서 청문이나 청진이 고생을 했지만 애는 그냥 뭐 하자면 하는대로 했고 손 잡고 가면 얌전히 따라다녔으며 입 자체를 잘 열지 않았음. 화산의 제자들도 그랬지만, 아이 또한 화산을 굉장히 조심스럽게 대하고 있었으니 청문은 그제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음. 백아가 겨우 건져올 수 있었던 것이, 화산에 대한 미련과 애정이었구나. 화산에 돌아가는 것을 포기했으면서도 끝끝내 외면하지 못한 후회와 소망이었구나.

 

 당보를 포함하여 화산의 사람들은 그 아이를 청명이자 화산의 어린 제자로 대했음. 검술 좀 봐달라며 스승으로 모실 때도 있었고, 같이 꽃구경이나 가자며 그냥 어린 자식을 대하듯 말하기도 했음. 화산이, 그리고 청명이 서로를 받아들일수록 청명이는 점차 밝아지며 과거와 같이 발랄해졌고, 청명의 혼을 담았던 고목에도 매화가 점차 만개하기 시작했음

 

 그리고 어느 날, 화산제일검이었던 삼대 제자를 떠나보내야 했던 장문인과 장로들이, 끝끝내 따라잡을 여지조차 주지 않고 홀로 먼 길을 가던 사질을 배웅하던 사숙과 사고가, 한 줌 그리움과 추억만을 남겼다며 투덜거리던 사형과 사매가 선계에 올랐을 때, 그 어린 아이는 말간 얼굴로 청문의 손을 잡은 채 투명한 눈동자에 그들의 얼굴을 새김. 아이 앞에서 울지 말라는 충고를 미리 들었음에도 결국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만, 그들이 화산에 속해있는 이상 언젠가 아이가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줄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음

posted by 이드(Reilu_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