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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Reilu_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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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0. 10. 17:07 화산귀환

* 그래도 청명이 생일 축전 하나쯤은 있어야 하겠지?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화산에는 이상한 기념일이 하나 있었다.

 

 무엇을 기념하는지, 혹은 추모하는지도 모르는 날. 누가 정했으며 어쩌다 정해졌는지 그 무엇조차 전해 내려오지 않으나 정마전쟁이 끝난 이후 청문진인의 방을 정리하던 누군가가 발견한 달력에 아주 중요하다는 듯 진한 붉은 먹으로 동그랗게 밑줄이 쳐 있었으며, 청진진인의 일정표에는 매년 그 날에만 아무런 일정이 잡혀있지 않았고, 심지어는 어떤 양민들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과나 월병따위의 간식거리 한 줌씩 가지고 올라와 화산에 전해주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 오로지 그 날, 시월의 열흘 째 되는 날에만 벌어지는 일이었다.

 

 물론 화산의 세가 기울며 화산을 방문하는 이들이 줄어들고 화산에 입문하는 이들도 반수 이하로 떨어졌을 무렵엔 다들 '카더라'라는 말로만 전해들어온,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날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매년 화산을 방문하는 양민들은 한둘이나마 있었으니 화산의 어른들, 일대제자쯤 된 이들은 양민들이 불쑥 찾아오면 어련히 그날이겠거니- 하고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화산에 청명이라는 이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차마 매끄러운 문장이 되지 못하는 말을 억지로 내뱉던 장문인, 현종은 제 눈 앞에 쌓여있는 물건들을 보며 기함을 했다. 은하상단에서 가져온 온갖 물건들이 화산의 대문 안쪽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으나, 재경각주인 현영마저 전혀 모른다는 눈치였으니 남은 범인이라곤 단 한 명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범인은 태연하게 부엌에서 집어온 것이 분명한 육포를 입에 문 채 걸어오고 있었다.

 

 "엥? 상단주 어르신 아니에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마저도 범인이 아니었다. 은하상단이 방문한 연유를 전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눈망울이 곧 탐욕으로 가득찬 어두운 눈빛으로 변하자 현종은 그저 '이딴게 도사랍니다'를 외울 수밖에 없었으나 어쨌든 청명이 지시한 일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이제 답을 들을 수 있는 사람에게 고개를 돌릴 수밖에. 상단주는 두어 번 헛기침을 하다가 이내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자초지종을 설명하였으나, 청명이는 아주 간단하게 그 모든 말을 요약했다.

 

 "그러니까 우연히도 10월 10일만 되면 사람들이 화산에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을 발견했는데."

 "그렇죠, 그렇죠."

 "최근들어 그 전통이 잊혀진 것 같아 마음이 아파서 준비한 물건이라구요?"

 "네. 저어얼대 화산과의 관계를 더 공고히 하려고 관련된 기록을 찾아본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찾아봤구만. 현종은 속으로 생각하면서 청명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공짜라면 양잿물도 받아다 제 알아서 써먹을 놈이니 곧 이어질 아첨과 아부를 견디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청명은, 현종조차 생각해본 적 없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는 아시고?"

 "어...... 아쉽게도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적어도 200년 가까이 된 전통이니 화산에 관련된 어떤 중요한 날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양민들까지 잊지 않고 찾아올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역시나 상인 아니랄까봐 말은 청산유수였다. 청명은 눈을 가늘게 뜨고 짐더미를 흘깃 살피더니 이내 '준다면야 감사히 받죠-'라는 말을 남기고 제 방으로 돌아가버렸다.

 

 

 

 

 

 그 날 저녁은 호화스러웠다. 상단이 가져다 준 물건들 중에는 그리 오래 보존하지 못하는 재료들이 섞여 있었기에 이렇게 된 거 잔치나 벌이자며 냅다 부엌에 들이부은 결과였다. 그 와중에도 청명이를 1순위로 챙기는 현영의 당부 덕분에 음식 대다수는 청명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고, 현종 또한 오늘은 눈감아주겠다며 술병을 따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사실 그동안 저들조차 잊고 있었던 화산의 어떤 기념일을 지금이라도 몰아서 챙기겠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위였으나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일 것이었다. 마음껏 먹고 마시고 취하고. 그렇게 한순간의 잔치는 이내 모든 음식과 술병이 동나면서 자연스럽게 파하게 되었다.

 

 "100년 전 장문인 하나가 자기 사제 생일 챙겨주고 싶다고 만든 날이야."

 

 유이설의 질문에 대한 청명의 대답이었다. 은근슬쩍 지붕으로 올라와 홀로 대작하는 청명을 끝내 찾아낸 집념에 못이겨 한 말이기도 했다.

 

 "그 사제가 고아였거든. 삼대 제자 시절부터 그래서 눈에 밟혔는지,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 줬어. 그러다가 한 번은 생일도 없는 사제가 영 안쓰러웠던거야. 그래서 장로님들에게 물어물어 그 아이가 입문한 날짜를 알아내 생일이라고 칭하고, 다른 사람들 못지 않게 축하하는 날로 만든거지."

 

 정작 당시의 청명은 생일은 아무래도 좋다며 부끄러움을 숨기려 들었음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도문에 입문한 이들은 아무리 반쯤은 속가와 섞었다 한들 속세와의 연을 끊고 수행을 쌓는다는 의지를 반영하여, 자연스레 나고 스러지는 날을 챙기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생일을 챙기겠다며 호들갑을 떠는 청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어린 청명은 사형이 아직 속세의 때를 벗지 못했다 여기기도 했었다.

 

 "그런데 삼대 제자가 무슨 힘이 있었겠어. 그래서 낸 계책이 다른 사형제들이랑 같이 양민들에게 고개 숙여가면서 부탁하는 거였지. 제 사제가 내일 생일인데, 잠깐이라도 축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고. 화음현 사람들이야 워낙 화산에 받은게 많으니까 일부러 그 어린 애가 좋아할만한 과자를 싸들고 화산에 올랐던거야. 사제는 처음엔 2, 3년이면 그만두겠지, 이대 제자로 올라가면 그만두겠지- 하다가 결국 기념일처럼 되어 버리고. 결국 그 사형이 장문인이 되면서까지 마을 사람들은 매년 화산에 간식을 챙겨줬는데, 그게 이어졌을 뿐이야."

 

 이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청문의 부탁 없이도 그들은 청명을 기억했다. 덕분에 청명은 단 한 번도 제 생일을 외로이 보낸 적이 없었으며, 아주 나중에서야 그 모든 것이 화산의 선물임을 알았다. 그리도 바쁘던 청진도 그 날만큼은 일정을 비워둔 채 청명의 술자리에 어울려 주었고, 기록에는 없어도 종종 당보가 화산의 담을 넘어 들어올 떄도 있었으며, 혹시나 모자라진 않을까 청문은 전날 화음에 내려가 미리미리 과자를 잔뜩 주문해놓기도 했었다. 100여년 전 청명의 생일은 그런 날이었다.

 

 유이설은 대답을 들었다는 듯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청명은 마지막으로 남은 한 모금을 들이키며 지붕에 몸을 뉘였다.

 

 "덕분에 이번 생일도 입이 심심하지는 않았소, 사형."

posted by 이드(Reilu_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