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래서 또 씀
* 지긋지긋하지만 또 구화산으로 회귀한 청명이
* 쓰다가 졸려서 좀 끊고 나중에 추가함
1. 청명은 이제 진지하게 고민해야만 했다
원래 2번째 생에서도 진지하지 않았다는건 아닌데, 그럼에도 이번의 생에서는 고민의 결이 달랐음. 왜냐하면, 분명 100년 후 23대 제자로서 천마를 베고 눈을 감았던 것이 생생한데 또다시 13대 제자가 되어 눈을 떴고, 심지어는 고작 6살 무렵이었으니까! 심지어 13대 청자배들을 받는 첫 날!
청명은 심각하게 고민해야만 했음. 왜냐하면 두 번의 생 모두, 청명은 '성공'했다고 할 수가 없었으니까. 첫 생은 제 모든 것들을 잃고 천마를 죽인다는 오로지 하나의 목적만을 달성했고, 두 번째 생은 그를 바탕으로 후회하던 것들을 온전히 마무리지었다 여겼으나 저가 눈을 감을 때 보였던 사숙사형들과 천우맹 사람들의 표정이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았으니까. 이미 흘러갔어야 하는 사람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후손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말았으니, 후회는 없으나 청명 본인에게도 큰 흉을 남겼음
그래서 더더욱 고민해야만 했음. 2번째 생의 23대 청명의 화산은 무너지기 직전이었고, 그 와중에 들어온 천재가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끌었기에 어느정도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으나 지금의 화산은 그것이 아니니까. 화산은 강한 문파였고, 그만큼 선망과 동시에 시기와 질투, 견제도 많이 받았음. 첫 생의 매화검존은 장문인의 예리한 검이 되어 그것들을 찍어눌렀으나, 그 결과는 화산의 독선에 이어진 전멸이었음. 물론 지금의 청명은 왜 당시의 화산이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이해하고 있었으나 이것을 현 화산에게 어찌 가르쳐야만 할까. 대체 어찌해야 지금의 강한 화산이 저가 100여년의 시간에 걸쳐 배워온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쨌든 시간은 흘러갔음. 청문을 시작으로 청자배들이 하나씩 들어왔고, 과거의 자신에 대해 수도 없이 후회한 청명은 예전과 같이 마냥 망둥이처럼 굴지 않았음. 물론 그 성격이 어디 가는건 아니었지만 적당히 참고 누를 줄도 알고 예의를 차릴 줄도 알았으며,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냅다 패기보단 그래도 사형 사숙이라는 생각으로 한 번은 화를 삭혔음. 아무리 청문이니 다른 청자배들이니 해도 당시는 10대 혈기왕성한 어린애들이라, 오히려 한참은 어린 청명이 그렇게 참는 것을 보고 과연 도가에서 자란 아이라 가르침이 깊다 착각한 이들이 왕왕 속출함. 그리하여 하루는 대사형이라는 직위에 조금 버거워하던 청문이 청명이를 옆에 앉혀둔 채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데
청명아. 이 사형은 부족한 사람이라, 네가 많이 도와줬으면 한다
그 말을 듣고, 청명은 그럭저럭 괜찮은 생각을 하게 됨. 과거 화산, 특히 청문이 장문인이 되며 화산이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청문의 훌륭한 인품과 그를 받쳐주는 청자배들이 있었기 떄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다들 말로 하지 않을 뿐 청명의 존재에 있었음. 처음은 대화, 그 곳에서 충돌하면 설득, 그러고도 어긋나면 회유, 그 최종선이 검존출격이었으니 결국 마지막 선을 이길 방법이 없었던 다른 문파들은 죄다 화산이 하자는대로 따라갔으니까. 그것은 결국 화산의 오만을 불러왔고, 그렇게 십만대산에서......
그러니 청명은 결심함. 이번 생에는 몸을 좀 사리자고. 적당히 화산제일검 소리를 들을 정도로만 활동하고, 그 이상의 힘은 철저히 숨기자고. 그리하여 화산의 적을 베어내는 검이지만, 화산조차도 모르는 숨겨진 검이 되자고.
2. 사제가 뭔가 숨기는 것 같은데 말이지
청문을 비롯한 청자배들은 저들보다 한참은 작은 몸으로 뽈뽈거리며 검을 휘두르는 청명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음. 물론 청명에게 들킨지 오래지만..... 청문은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듯 했음. 처음 검을 잡고 육합검을 시작한 날, 그 첫 초식인 내려치기에서 청명의 검 끝에 살포시 내려앉은 매화 한송이를. 정작 청명이 본인이 흠칫 놀라서는 그를 목격한 몇몇 청자배들이 제 눈을 의심하며 청명의 검로를 주시했으나 청명은 습관적으로 피워낸 매화를 지워내고 오로지 정직한 검로만을 그리고 있었음. 오히려 이 이야기를 사숙들이나 장로님들께 했더니 다들 잘못 보았을 것이라며 너무 조급해하지 말라는 조언까지 듣고 말았으니...... 그리하여 청문 포함 약 5명쯤 되는 청자배들은 저 혼자 수련하는 청명을 숨어서 지켜보며 매화가 피진 않을까 관찰했는데, 청명은 이미 그 병아리 or 병아리들(일단은 사형이지만)의 기척을 모를 바보가 아니었으니 이렇게 반복되는 상황만 발생할 뿐이었음
몇몇 사형들은 저들이 정말 매화에 대한 갈망 떄문에 잘못 보았는가보다 하고 포기하려 하는데 청문과 청진 두 사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음. 청진은 무학의 이해에 대해서는 정말 영리한 사람이었고, 첫 날부터 장서각에서 허락된 무학들을 죄다 머리에 넣어뒀는데 청명이 처음 보인 그 육합검은 말 그대로 정석중의 정석이었기 때문임. 심지어 매화가 피지 않는 지금도 감히 무각주 장로님이나 현 화산제일검 사숙조가 보여주었던 육합검은 가져다대기도 어려울 정도의 경지였으니..... 고작 육합검 하나라지만 화산의 모든 무학의 기초는 육합임을 모를 청진이 아니었음.
청문은 얼마 전 청명에게 저를 도와달라 했을 떄 청명의 대답을 기억했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사형 편이다. 그러니 사형 또한 내가 따를 수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고민해달라'. 그 떄 청명은 감히 6살짜리 아이가 보일 수 있는 깊이의 눈이 아니었음. 이제 등선을 앞둔 태상장로들에게서나 볼법한 분위기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있으니, 청문은 청명이 저리 행동하는 것 또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음. 청명의 검로는 정직했음. 아무리 어릴 때가 체력이 좋다지만 그래봐야 실제로 붙어보면 10살은 차이나는 사형들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을텐데, 청명은 매일 수련이 끝나면 아침과 저녁을 가리지 않고 저 홀로 수련에 몰두했음. 심지어 하루는 달이 한창일 떄 검을 휘두르는 모습까지 본 적이 있으니......
다만 청문은 청명의 대답을 믿기로 했음. 저 아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고 실천하는 것이니, 우리는 그저 언젠가 청명이 모든 것을 털어놓길 기다려보자.
3. 인간관계가 바꼈는데
이제 막 지학(15세)이 된 청명의 최근 고민은 그것이었음. 과거에는 문파나 항렬을 가리지 않고 온갖 패악을 다 부리고 다녔고 그만큼 (반강제적인) 문파 교류가 생겼으며, 좋던 싫던 적당히 말 붙이고 다닐만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지금의 청명은 화산에만 틀어박혀 있는데다 실력도 중위권 정도를 위장하고 있어서 일부러 비무를 신청하는 자들도 없었음. 물론 이상하게 눈에 안띄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청문은 항상 청명을 데리고 다닌다던지 하는 둥 대우를 했고, 다른 청자배들도 그저 청명을 업어키웠으니 정이 많이 들었다거나 혹은 종종 보여주는 싶은 심계 때문에 데리고 다닌다고 생각했음.
어쨌든 지금 상황은 청명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음. 이러나저러나 이전 생의 화산은 청명이 날뛰고-아 죄송하긴 한데 뭐 어쩌라고요 꼬우면 덤비던가요-비무대결 << 의 양상으로 흘러가는 일이 종종 있었고, 그렇게 문파간의 교류가 상당히 자주 이뤄졌으며 특히 종남같은 경우는 타도 청명을 외치며 제 능력을 키워낼 정도였으니, 청명이 날뛰지 않으면 반대로 이 평화에 길들여진 무림인들이 얼마나 나태해질지는 100년 뒤를 보고 온 청명에겐 너무나 뻔한 이야기였음.
그렇다고 굳이 다른 문파 건드려서 문제 일으키고 싶지도 않고, 구우우우욷이 다른 놈들이랑 허례허식 챙겨가며 친분 나눌 생각도 없고..... 하다가 문득 당보가 생각남. 그래도 술잔 나누는 것이 싫지는 않고, 다른 놈들과 다르게 스스로 사천을 뛰쳐나와 실력을 키우려 들면서- 또라이지. 그럼 만약 그놈을 잘 구슬려서 저 대신 날뛸 강호의 화젯거리로 만든다면? 대략적인 계획이 세워지자 청명은 바로 실행에 옮김. 물론 적당한 변명거리를 대가며 외출 허가를 받아낸 뒤에.
냅다 사천당가 담벼락을 뛰어넘은 청명은...... 이제서야 가장 큰 문제를 떠올리게 됨. 당보와의 나이차이는 약 5살 남짓이었고, 청명이 15살이면 당보는..... 10살....... 심지어 직계도 아닌 방계였으니 저가 알던 당보의 방에 있을 리가 없었음. 거기다 고작 10살짜리 아이에게 제 계획을 맡기기엔 양심이...... 결국 몇 년 후를 기약하기로 하며 다시 담벼락을 넘어가던 찰나-
어린 당보와 눈이 마주쳤음.
마침 당보는 방계 아이들을 모아 걸러내고 있던 당가 본가에 오던 중이었고, 보호자 없이 가야만 한다는 규칙에 따라 홀로 길을 걷고 있었음. 그 떄 눈 앞에 내려온 수상한 사람...... 아니, 도복을 입고 있으니 무인임에 틀림 없는 이에게 시선을 빼앗김. 그리고 당보는 그렇게 처음으로 '무인'을 만나게 됨. 사천당가인데 무인을 처음 보는게 말이 되느냐? 싶긴 한데 당보는 처음부터 방계였고 독밥을 먹는다던가 하는 것을 납득하지 못한 데릴사위와 무공을 전수받지 못한 당가 어머니가 적어도 아이 스스로 결정할 떄까지는 시간을 주고 싶다며 좀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치자. 어쨌든 동네 또래들이랑 술래잡기나 하는 것이 세상의 전부였던 당보에게, 제 키보다 수 배는 높은 담벼락을 도움닫기 하나 없이 훌쩍 뛰어넘는 모습은 그 나잇대 남자애들의 선망을 받기 충분했음. 그리하여 청명은 10살에 제 몸보다 큰 장포를 입고 눈을 반짝이는 당보를 만나게 됨
무인이 되면 이런 것을 할 줄 아는 겁니까?
아니? 이런건 무인 축에도 못끼지!
나, 난 사천당가의 방계인 당보라고 합니다! 형님은 성함이 어찌 되시오?
....... 화산의 청명.
화산! 들어는 보았소! 도가이자 검을 쓰는 명문이라고! 그런데 섬서에서 여기까는 어쩐 일이시오?
음....... 내가 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걸 하려면 내 등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해서.
그런데 왜 그냥 가시오?
암기 다루는 데에는 당가가 최고라고 들어서 찾아와본건데, 아쉽게도 다들 암기가 아니라 독에 치중을 하고 있어서.......
청명은 저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억지로 속이는 것 같아 양심이 찔렸지만 어쩔 수 없었음. 저 어린 당보를 잘 구슬려서 저 대신 강호를 누비며 경각심을 심게 만들겠다는 작전이었으니..... 청명은 적당히 애들 앞에서 허세부리는 십대마냥 대꾸해주었고, 어린 당보는 눈을 반짝이며 그걸 경청함.
그럼 내 언젠가 형님 뒤를 따라갈테니, 그 떄가 되면 받아주시겠소?
아서라. 아직 쪼끄만게 무슨. 내 뒤를 받치려면 적어도 천하삼대검수쯤은 이길 수 있는 녀석이어야 하지 않겠냐.
그럼 그들을 이기고 나면 받아주는게죠?
그러던가. 그 떄는 화산으로 와라
어느 정도 성공이라고 볼 수 있었음. 독에만 집중한다는 말을 흘려 독 의존증을 줄이고(이건 원래 생에서도 그리하였으니 큰 걱정은 안됐음), 사천 밖 세계를 알려주었으며, 언젠가 잊혀질 어린아이의 약속이지만 화산을 찾아오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으니, 몇 년 후 당가에 신동이 났다는 소문이 퍼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음. 그러나 그렇게 헤어지기 전, 청명은 당보를 다시 불러냄
당보야. 잘 봐라. 이게 언젠가 네가 받쳐줄 검이다.
딱 한 초식. 당보에게 보여준 것은 단 하나 뿐이었으나 당보는 청명이 다시 갈 길을 떠나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음
청명은 사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음. 그래도 과거 유일하게 술잔을 나눌 수 있었던 친우였고, 결국 살아있을 적 그의 존재에 감사해본 적 없는 전우를 겨우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제대로 친분조차 나누지 못했으니. 예전 생의 둘은 당보의 일방적인 비무신청과 개차반적인 청명의 성격, 그리고 그에 못지 않은 당보의 똘끼로 인해 맺어진 친우였으니 이번 생에서 둘의 관계가 같아지리란 보장은 없었음. 오히려 당보는 저를 잊을 것이 분명했음. 고작 10살에 구두로 한 약속이고, 지금이야 기억하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굵어지면 청명을 허세부리는 동네 형 쯤으로 추억하게 될테니. 게다가 청명은 실력 없는 척 제 존재를 화산 속에 숨기고 있어 당보가 명성을 얻고 화산을 오를 때 쯤이면 저가 아닌 다른 이가 당보를 상대하게 될 터였음.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너무나 반가웠고, 제 뒤만 쫒아다니다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청명을 위로했음
그리고 딱 25년 뒤. "복잡한건 모르겠고, 화산의 청명은 저랑 일단 한 판 뜹시다!" 라며 쳐들어온 강호의 유명인사 당보 때문에 화산이 한바탕 뒤집어진 것은 모를 일이었음
4. 당보의 이야기
청명의 예상과는 달리, 당보는 청명을 잊지 못했음. 처음에 그 이야기를 했을 땐 고작 열댓살이나 됐을 아해가 검을 쓰면 얼마나 잘 쓰겠냐며 다른 무인들은 그 이야기를 무시했고, 당보 또한 그저 그런 줄로만 알았음. 그러나 암기술에 두각을 보이고, 청명의 말처럼 독에만 의존하는 이들을 봐가면서 사천을 벗어나고자 마음먹었을 때, 당보가 처음으로 비무를 신청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히 검을 쓰는 자였음.
수도 없이 많은 무인들에게 비무를 신청하고 그 이름이 드높아지면서 점점 수준이 높은 이들이 당보에게 몰려들었는데, 그 중 그 누구도 당시의 청명이 보여주었던 단 한 번의 내려치기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보여서...... 어쩌면 자신이 정말 기연 중의 기연을 만났다 여긴 당보.
그리하여 청명의 약속을 지키고자 천하삼대검수..... 는 좀 무리였고 그 검수를 배출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남궁세가와 무당, 종남을 찾아가 비슷한 항렬 사람들을 죄다 이겨낸 당보는 마지막으로 화산으로 향했음.
다시 만나게 된 어릴 적의 인연. 당보는 냅다 비무를 신청함. 그 떄 그 검로를 다시 보고 싶었기에. 그러나 청명은 자신을 숨기고 있었고, 화산의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적당히 상대하다가 당보에게 져주는 그림을 연출함. 당보는...... 정말 화가 났음. 그냥 자기가 잘나서가 아니라, 청명이 자신을 봐주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여서. 남들이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며 환호하고 있지만, 당보에겐 고작 검 끝을 흔드는 것으로 비도의 궤적을 틀어버리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으니...... 오히려 반대로 의문이 들 정도임. 들어보니 저들은 청명의 경지가 그리 높지 않다고 여기는 듯 했음. 물론 자신도 아직 젊고, 오히려 강호에선 어린 축에 속하니 자신의 위로 더 어마무시한 괴물들이 있을 것은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청명이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경지가 낮다는 것은 절대 아니었음. 오히려 그리 반응할수록 청명의 능력이 무서울 정도였는데, 매일같이 검을 맞대는 사형제들 사이에서도 눈치채지 못하게 독자적인 검술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어쨌든 어설픈 연기를 하며 자신에게 져주는 꼴에 화가 난 당보는 대충 손님방에 들어가 문을 걸어잠그고 맘. 자신은 청명을 만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왔는데 정작 상대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지도 않고 있으니...... 서러움과 분노가 뒤섞여 머리가 아파오는데, 갑자기 창문이 열리고 청명이 들어옴.
가자.
....... 어딜 가시겠다고?
그러면서도 주섬주섬 장포를 챙겨 입고 청명을 따라 나섬. 전각이 보이지 않는 산의 정 반대편까지 도달한 두 사람은 이내 서로를 마주하게 됨. 청명은 천천히 검을 뽑음. 예전에 보여주었던 목검이 아니라 진짜 날이 서린 검. 아직 이대제자밖에 되지 않아 그리 좋은 검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명문 문파에 납품되는 물건인 만큼 어설프지도 않은 진검. 그 검이 고작 기수식을 취하는 데에 달빛이 반사된 검로가 그리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음
안오냐?
........ 허
만족 못했잖냐.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남들 눈 없는 곳이라면.
거 온갖 것을 숨기고 다니는 속 검은 말코였구만. 그리 말하며 당보는 다시 청명에게 비무를 요청했고, 처참하게 깨짐.
당보는 청명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보다 의문을 해소하는 것이 먼저였음. 대체 왜 그 실력을 가지고도 이리 조용하게 숨어 지내는지. 물론 속세를 등지고 은거하는 고수들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건 온갖 경험을 다 해본 어르신들에게나 있는 선택지이지 충분히 젊은 청명이 굳이 선택할 이유가 없었음. 게다가 만약 정말 은거하고자 했다면 지금쯤 폐관수련이라는 핑계로 저를 만나주지도 않았을거고. 청명의 사형제들은 청명의 그 어설픈 실력에 의심도 없는 듯 하니 거진 평생을 숨기고 살았다는 말과 동일했음. 그런데 왜-
왜 그때는 제게 보여주신겁니까?
.........
아니, 그 때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그다지 의미도 없겠지요. 제가 잊을거라고 생각했던지, 혹은.......
.........
당가의 어르신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분이 계셨지요. 그분은 그저 아침에 이슬이 서린 모습을 보았을 뿐인데 그 날 날씨는 물론 다음날까지 맞추더랍니다. 한 번은 어찌 그리 잘 아시느냐 물었는데, 그분은 그저 '그런 것이니까'라는 말만 하시더군요.
형님도 아마 그런 것이겠지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거대한 무언가를 그리고, 그에 따라 그저 해야만 하는 일을 해나가는.......
청명은 답하지 않았지만, 침묵은 긍정이었음. 당보는 이렇게 깨져본 것이 오랜만이라며 비도를 갈무리하고, 전혀 싸운 티가 안나는 청명을 보며 말함.
누군가는 그릇이 크다고 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속세를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흔히 그 것을 합쳐 도사니 신선이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지요. 이 사천당가의 암존 당보. 대화산파의 청명을 형님으로 모시고 싶소.
........ 하.
결국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청명은 말을 삼키고는 그저 좋을대로 하라는 말로 대꾸했음. 당보는 허락을 받은 것이 그리도 기쁜지 제 주머니를 뒤져 술병 하나를 쑥 꺼냄.
이렇게 좋은 날엔 술이 빠질 수가 없지! 아, 형님은 도사라 술을 못드시나?
당보야.
네?
........ 한 병 더 없냐?
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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