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너에게 한 달을 주마

이드(Reilu_L) 2022. 10. 25. 22:41

* 어느 날 구화산으로 떨어진 검협을 검존이 죽이는 이야기

 

 

 

 

 

 

 1. 하나. 기한은 다음 보름달이 뜰 때까지

 

 화산에 오른, 검은 무복의 아해는 검존에게 검을 겨누며 그리 말했음. 다른 문파를 방문하면서 인사도, 일말의 예의도 갖추지 않는 모습에 검존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은 격노했으나, 그 누구도 앞에 나서지 못한 것은 첫째로 청문이 아무 지적도 하지 않았기 떄문이며, 둘째로 성격 급하기론 따라갈 자가 없는 그 검존이 검을 뽑지 않았기 때문이었음. 가장 가까이 있던 청진은 이후 회상하기를, 검존은 그 때 분명히 긴장하고 있었노라 확신했었음.

 

 그 아해, 고작해야 20세 언저리의 무인은 특색 없는 검을 내려놓지 않은 채 검존만을 노려보고 있었음. 그는 검존을 막아서고 앞서있는 청문도, 그 옆에서 언제든지 지령을 내릴 준비를 한 청진도 무시한 채 오로지 검존만을 향해 말했음.

 

 너에게 한 달을 주마.

 

 그리고 그 때까지 나를 죽이지 못하면, 내 손으로 화산의 모든 이들을 베어버리고 그 흔적조차 남지 않도록 불태울 것이다.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검존의 검이 무인, 검협을 향해 내리꼿혔음.

 

 

 

 

 

 2. 둘. 화산의 산문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는다

 

 대신 자신은 화산에서 나가지는 않을 것이며, 멸문은 화산에 오르는 모든 것들이 대상이라는 말에, 청문은 당장 내일 오르려고 하던 상인들에게 전서구를 보냈음. 다행히 식자재와 같은 물건들은 보급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한 달 정도야 적당히 아껴먹으면 버틸 만은 할 것이었음. 그러나 청문은 그런 청진의 보고를 들으면서도 시선은 여전히 담장 너머를 향해 있었음. 정확히는, 첫 일격에 이렇다 할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반격 한 방을 맞고 쓰러졌던 제 사제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뛰쳐나간 그 방향을.

 

 감히 검존의 패배라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했던 화산의 제자들이 굳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었음. 그러니 이후 스스로 붙인 조건에 따라 순순히 담장 너머로 사라진 검협을 쫒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음. 딱 일각 기절해있던 검존은 이후 청진이 말해준 나머지 조건들을 듣자마자 제 검을 가지고 뛰쳐나갔고, 그렇게 검존이 산문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지 어언 3일이 지나 있었음

 

 화산의 사람들은 다들 그 정체불명의 무인에 대해 추측하기를 멈추지 않았음. 100여년 동안 동굴에서 나오지 않은 은거고수다, 하늘에서 청명 장로님을 위해 내려보낸 기연이다, 혹은 천하제일인의 수준을 가늠하고자 하는 마교의 일당이다 등등. 그러나 그 무엇도 그럴싸한 증거를 대지 못했고, 설령 정체를 알아낸다 한들 별로 도움되는 것은 없었기에 어디까지나 담장 너머로 나서지 못해 답답한 사람들의 수다거리에 불과했음. 다만 그 와중 자신도 모르는 사이 꽤나 근접한 추측을 내놓은 사람은 존재했었음

 

 ........ 장문사형. 아무래도 그 사람은-

 그래.

 

 청진이 절대 잊을 수 없는 검술. 그리고 청문이 절대 헷갈릴 리 없는 아이. 그러나 그 둘은 그저 마음 한 구석으로 그 모든 잡념을 몰아둔 채, 어찌하여 그가 이렇게 화산으로 올 수밖에 없었는지만을 고민했음

 

 

 

 

 

 3. 셋. 내가 먼저 공격하진 않는다

 

 보름이 지날 때까지는. 그렇게 되면 너무 쉬워지니까. 알기 쉬운 도발이었으나 검존은 그것이 사실임을 알았음.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모아둔 내공은 자신의 십분지 일도 되지 않을 저 아해는 분명 자신보다 강했으니까. 검존은 자신이 삼대제자 시절 만났던 남궁의 가주를 떠올렸음. 당대 천하제일검수에 제일 가까웠던 그였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건데 당시 자신과 남궁가주간의 격차보다도 자신과 저 아해간의 격차가 압도적으로 크다고 느껴졌음. 마음만 먹는다면, 제대로 된 반격을 하기도 전에 철저히 농락당하다가 죽어나가겠지, 나는.

 

 검협은 자신의 조건을 철저하게 지켰음. 검존이 겨우 따라잡아 눈 앞에 마주한다 한들 선공해 들어가지 않는다면 검을 뽑지도 않았음. 너무나 무감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철저한 무시의 시선을 검존은 극도로 화가 났음. 그러나 여전히 냉정한 머리와 더욱 냉정한 가슴으로 제 모든 것을 내던져 화산을 멸하고자 하는 아해에게 검을 들이밀었고, 그렇게 반 시진 정도를 기절했다 깨어나기를 반복했음. 검존은 이 모든 것이 저 아해, 검협의 계산이자 설계임을 모르지 않았으나, 자신이 한 달 내로 그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벌어질 일에 이를 악물고 쫒아야만 했음

 

 자신의 모든 조건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었으니, 처음 제시했던 조건만큼은 무조건 지킬 것이라는 생각이 검존을 점차 초조하게 만들었고, 검협은 그것을 하나씩 공략해나가고 있었음. 산문으로 들어간다면 조건에 따라 조금은 쉴 수 있었겠지만 검존은 나무열매를 따고 적당히 사냥을 하는 등 자급자족의 생활을 이어나가며 산문으로 접근하지 않았음. 어쩌다 불안감이 들 때만 잠시 멀리서 산문이 무사함을 확인하고 재빨리 검협의 뒤를 쫒았으며, 그 때마다 어찌 알았는지 청문은 검존이 있던 곳을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음. 그러다가 이내 그믐날, 청문은 결국 사천으로 전서구를 보내게 되었음

 

 

 

 

 

 4. 넷. 무공만을 제한하지 않는다

 

 우웩. 검존은 옹달샘에서 머금은 물을 내뱉었음. 아무리 자신이 만독불침에 가까운 몸이라 한들, 그리고 당보 녀석과 지내며 어지간한 독극물을 구별할 줄 안다고 한들 제대로 된 회복을 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극물로 목을 축일 마음은 없었음. 심지어 그 냄새도 심히 독하여, 차라리 말라죽는 것이 훨씬 나았음. 독한 놈. 검협은 마치 검존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다는 듯 수원에는 독을 탔고 나무열매 근처에는 함정을 팠으며 시시때때로 검존 근처에서 알짱대며 일부러 전투음을 내 동물들을 도망가게 만들었으니, 검존은 제대로 된 식사는 물론이거니와 목도 축이지 못한 채 보름째 그를 쫒고 있었음.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음. 검존은 누가 뭐래도 현재 천하에서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빠르게 변화하는 전투 양상에 맞춰 적응해나갔음. 함정을 팠다면 미리 파훼했고, 단순히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검협의 행동을 예상하려 했으며, 놈도 사람인 이상 물과 음식은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똑같은 방법으로 대응하기도 했음. 어쨌든 그럴 때마다 검협은 더욱 악랄한 방법을 사용했고, 검존은 그에 적응해나가며 전투를 벌인 지 딱 보름. 그믐이 뜨는 날부터, 검협의 선공이 시작되었음

 

 검존은 자신이 어쩌면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음. 그만큼 검협의 공격은 매서웠고, 감히 쉴 틈을 찾기도 어려웠음. 계속해서 날이 선 채 주변을 경계했으나 조금만 느슨해지면 어찌 알았는지 습격해오는데다, 아무리 흔적을 숨겨도 귀신같이 자신을 찾아내었으니 검존은 계속해서 화산이 불타는 상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검협을 향해 날리는 검기를 멈추지 않았음

 

 당보가 찾아온 것은 그믐날로부터 딱 3일이 지났을 떄였음

 

 청문이 들려준 것인지 청진이 챙겨준 것인지. 한 손에는 말린 과일과 육포에 물병, 다른 손에는 새 매화검과 도복을 들고 털레털레 청명을 찾아 화산을 뒤지던 당보는 청명을 앞에 두고 코를 킁킁댔음. 영문도 모르고 화산이 멸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막을 수 있는 것이 자신밖에 없다는 압박감에 신경이 날카로웠던 청명은 당보의 머리를 한대 내리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음.

 

 킁킁. 형님. 이거, 대체 누구요?

 

 만리추종향이라고, 무향으로 느껴지지만 특수한 훈련을 받으면 몇 리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물건이오. 그런데 이건 당가 직계 아니면 잘 모를텐데...... 드디어 당가에서 말코를 이겨먹을 기재가 나온 것이오?? 당보의 실없는 소리에 이내 검존은 거진 보름만에 희미하게 웃었음. 더불어서 어찌 검협이 자신을 그리도 잘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렸으니, 당보의 조언에 따라 나무열매 즙으로 향을 지워내고 나서야 검존은 급하게 육포를 씹어 삼켰음. 거 참. 꼭 단 둘이서 하는 전쟁의 축소판같구려. 당보의 중얼거림에 검존은 고개를 들었음

 

 보십시오, 형님. 적의 전력이 얼마인지도 몰라. 언제 어디서 쳐들어올지도 몰라. 패배하는 순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고, 무력의 강약에 관계 없이 온갖 비겁하고 더럽고 치사한 수를 다 쓰는데다 그에 맞서기 위해선 나도 모든 것을 다 걸어서 싸워야만 해...... 대체 왜 일어났는지 이유도 뭣도 모르지만, 어쨌든 도망칠 수도, 패배할 수도 없다는....... 이게 전쟁이 아니고 뭡니까?

 

 그러나 그에 대답하기도 전, 당보를 향해 급습하는 검협을 향해 검존은 검을 뽑아야만 했음

 

 

 

 

 5. 다섯. 그러나 약속의 날까지 너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아, 깼소? 당보의 말에 검존은 몸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보았음. 어쨌더라. 당보를 밀쳐내긴 했으나 급하게 잡은 자세에 제대로 힘이 실리지 않았고, 결국 큰 타격을 허용하고야 말았던가. 당보가 뒤이어 응전했으나 역시나 한 합에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고, 그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산문 안으로 돌아와 있었다고. 청진에게 물어보니 검협이 둘을 끌고 와서 의약당 건물에 집어던지고 사라졌으며, 그 이후로 벌써 3일이나 흘러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하루 뿐이었음. 그 말을 듣자마자 검존은 뛰쳐나가려 했으나, 이내 청문이 들어와 그런 그를 눌렀음

 

 화산을 지키지 못한 것이, 너의 잘못은 아니란다

 

 화산은 너 혼자 지켜야 하는 곳이 아니며, 내가 그리 두지도 않을테니까. 그런 청문의 뒤로, 모든 화산의 제자들이 도열해 있었음.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검존에게 청문이 이르기를-

 

 그러니 마지막은 언제나 우리가 함께 할 거란다

 

 

 

 

 6. 잘 써먹도록 해. 후회하지 않도록

 

 청진의 전략은 빛났고, 청문의 지휘는 유연했으며, 청명은 그 한 달 동안 급격하게 늘어난 무공을 마음껏 뽐냈음. 그 뒤를 당보가 받쳤고, 다른 제자들이 청명의 눈과 귀를 대신했으며, 그 누구도 청명의 짐이 되지 않았으니...... 목적을 이룬 검협은 적당히 응하다가 이내 순순히 검존에게 제 목을 내어주었음

 

 검협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목적이나 그 외의 것을 단 한 가지도 입밖에 내지 않았음. 전력을 다한 싸움 끝에, 세월의 차이가 만들어낸 내공의 절대량으로 생겨난 아주 약간의 차이 덕분에 간신히 먼저 목을 베어낸 검존에게조차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나, 몇몇은 이미 검협의 정체를 의심하면서 눈치챈 상태였음. 한 달간 자신의 전력을 끝까지 쏟아낸 검존은 스러졌고, 그런 그를 데리고 의약당으로 향하는 제자들을 뒤로 한 채....... 청문은 점차 흐릿해지는 검협에게 물었음

 

 이제 만족하느냐?

 

 피식. 암요. 만나고 싶었던 사람도 만났고, 해야만 하는 일도 다 했고, 하고 싶었던 일도 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합니다. 그런 검협에게 청문은 다시 물었음. 남기고픈 말이 있더냐? 검협은 잠시 고민하더니 끝끝내 숨겨뒀던 자신의 검, 암향매화검을 꺼내 건네주었음

 

 잘 써먹도록 해. 후회하지 않도록.

 

 무려 일주일이나 잠들었다 깨어난 검존은 그의 유언 아닌 유언을 전해듣고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음. 검존은 바보가 아니었음. 그렇게까지 철저하면서도 가혹한 전투는, 굳이 그를 괴롭히거나 진정 화산을 멸하고 싶어서가 아니었음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음. 정확히는, 검존을 최우선으로 한 화산 전체에 내리는 어떠한 가르침일 터였음. 검협의 말은 이미 자신의 가르침은 주었으니 그를 잊지 말라는 것인데, 검존은 대체 급격하게 늘어난 무공 외의 가르침은 얻지 못하였다 여기고 있었음. 물론 자신보다 강한 자와의 비무는 둘도 없을 기연이자 깨달음이지만, 검협이 말하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닐것임은 분명했음

 

 어쨌든 겨우 한 달만의 휴식을 만끽하게 된 검존은 몸에 완전히 붙지 않은 무공을 체득하고자 잠시 연무장으로 나서려 했음. 급하게 들어오는 어느 거지의 말만 아니었더라면, 검존은 검협을 통해 보았던 화산 검술의 극의를 조금 더 빨리 익힐 수 있었을 것이나 당장 검존의 머리에는 그런 사소한 일따위는 들어오지 않았음

 

 마교가 발호했으니, 구파의 모든 이들은 전쟁을 준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