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화산귀환] 이 이야기는 픽션입니다

이드(Reilu_L) 2022. 3. 27. 22:24

* 현대물

 

 

 

 

 

 1. 화제의 소설 '꽃 피는 산', 영화화 결정!

 

 그 이야기에 백천(개명 전 이름: 진동룡. 성인 되자마자 제 손으로 호적 파고 개명함)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음. 소설 '꽃피는 산', 보통 '화산'이라고 줄여부르는 SF 소설은 신인 작가 '청자배'의 데뷔작으로, 발간 일주일만에 SF장르는 물론 소설 장르 전체 판매량 1위를 달성한 작품이었음. 더 나아가 20대 중반이 된 백천에게 있어 인생 최대의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준 최애작이기도 했고. 백천은 배우, 특히 액션 배우를 하고 싶었으나 엘리트 집안인 진가에서 허락해주지 않는 것은 물론, 큰형과 비교해 그저 문제아로 낙인찍고 살아왔음. 그러다가 고3 수능을 앞두고 그 소설을 접했고, 결국 남들에겐 비밀로 한 채 연극영화과를 지원, 합격한 뒤 바로 집을 나온 것이었음

 

 그런 '화산'이 영화화를 한다고? 심지어 아직 메인 캐스팅은 정해지지 않은 채, 배우의 명성이나 인지도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미지와 연기력만을 보고 캐스팅한다는 말도 덧붙여 있었음. 아직은 대형 영화사의 엑스트라나 3분짜리 조역, 독립영화 정도만 찍어온 백천에겐 희소식과 다를 바 없었음. 참 놀랍게도 제작사 역시 잘 알려지지 않은 신생 회사였는데 이런 거대 작품을 따낼 수 있었던 이유가 오로지 작가가 계획서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이유였음. 즉, 작가에게 어필만 할 수 있다면 자신도 기회가 있을 수 있다는 뜻. 그렇기에 백천은, 저 자신이 얼마나 마음에 들어했는지 개명한 이름까지 따라한 '백천' 역을 따내기 위해 이력서를 넣었음

 

 

 

 

 

 2. '꽃 피는 산' 캐스팅에 스타 배우들 지원서 날아들어

 

 '꽃 피는 산'은 수필이나 잔잔한 힐링소설같은 이름과 다르게 SF를 깔고 가는 우주전쟁물이었음. 혼란스러운 대우주시대 초창기에 질서를 유지하고자 노력한 '화산호' 가 전 우주가 휘말린 1차 대전쟁에서 인간을 그저 도구로만 보는 외계 생명체 '마교족'들의 모선을 들이박아 자폭하여 평화를 가져왔으나 그 외계 생명체의 존재를 이용하여 영향력을 키우고자 했던 다른 대형 함선들은 화산호의 존재를 기록에서 지우고 그 안에 자신들의 이름을 끼워넣었음. 그리고 100여년 뒤, 화산호에서 탄생한 전투형 안드로이드 '청명'의 마지막 백업 시그널이, 화산함이 마지막으로 탈출시킨 소형함에 수신되면서 일상형 안드로이드 몸체로 깨어나 벌어지는 일들이 소설의 전체적인 내용이었음.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조금 특이한 환생물로 묻히고 말았겠지만 화산호에서 안드로이드 청명이 받은 인간적인 대우, 그로 인해 안드로이드가 가지게 된 인간성과 오히려 그를 잃어가는 다른 대형 함선의 인간들, 자신의 창조주들의 명령을 끝까지 이행하면서도 그들이 그리워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지구'의 '꽃 피는 산'에 대한 상상을 하며 결국 진정으로 인간으로서 성장한 청명의 희생과 에필로그 장면으로 인하여 팬층이 두터운 작품이었음. 그렇기에 간간히 연예인들의 토크쇼에서 언급되기도 했고, 언젠가 꼭 영상화 되었으면 좋겠다는 배우들도 많았으니 지원서가 사무실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들어찬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음

 

 한가지, 작가가 후회한 것은 '오로지 실력과 이미지로 뽑겠다'고 장담하는 바람에 이 모든 사람들을 면접해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3. 저런 사람도 온다고??

 

 백천은 입을 다물지 못했음. 무려 국내에선 아깝다고 소문난 거장 중의 거장 청문과 최근 또 하나의 드라마 대히트로 몸값을 거하게 올린 배우 당보가 한구석에서 면접용 대본을 훑고 있었기 떄문이었음. 역할이 아닌 접수 순서에 따라 보는 면접이었고 모두에게 동일한 대본이 주어졌기에 무슨 역할에 지원했는지는 몰라도, 저 둘은 인지도가 문제가 아니라 정말 실력이 좋고 평소에도 화산을 좋아한다 공언하고 다녔던 이들이니 아무래도 강력한 후보자임이 틀림 없었음

 

 그런데 너희는 왜 따라온거냐?

 선배도 참. 저희도 지원했다니까요? 자기 연습하느라 우리 말은 듣지도 못했죠?

 

 조걸이 꿍얼꿍얼 말하는 것을 윤종이 옆구리를 찔러대며 막았음. 저희도 큰 역할은 아니라도 조연이라도 도전하고 싶어서요. 마침 저희와 이름 비슷한 배역도 있어서 넣었습니다. 아, 유이설 선배도 아까 소소와 함께 저쪽에서 리딩 중이더라구요. 백천은 한숨을 내쉬었음. 그럼 그렇지. 이 업계는 데뷔가 힘들고, 커리어가 없으면 이력서 하나 넣어보기 힘든 곳인데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애초에 이쪽에 관심이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었음. 잘 보니 자신들의 학교 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도 종종 보였기에, 백천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함. 그저 최선을 다할 뿐

 

 321번부터 325번까지 들어오세요.

 흠. 내 차례군. 먼저 다녀오마.

 

 그렇게 입장한 면접실에는 감독을 비롯한 5명이 앉아있었음. 아마 저 중 하나가 작가님일텐데..... 그런 생각도 잠시, 놀랍게도 이번 차례는 5명 모두 백천을 지원했고, 그렇기에 적어도 이들에게 밀려서는 안된다는 압박이 더해졌음. 다행히 백천은 화산의 찐덕후였고, 그렇게 무난하게 연기를 하나 싶었는데.......

 

 그럼 너희, 소설 내 백천의 대사 중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장면을 연출하고 인상깊은 이유를 설명해 봐

 

 제일 어려보이는 심사위원이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로 지시를 내렸음. 이에 곧 각자 자신이 보았던 가장 인상깊은 장면을 연기했고, 마지막으로 백천의 차례가 되었음. 백천은..... 잠시 고민했음. 제일 인상깊었던 장면이라. 모든 장면이 좋았고, 모든 장면이 뇌리에 생생하지만 과연 무엇을 연기해야 가장 적절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까. 이내 백천은 표정을 굳혔음. 너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두 눈은 무언가에 분노하고 있었고 입술은 그것이 튀어나오지 않도록 꾹 다문 채로, 그 어떤 자세도 아닌 그저 꼿꼿하게 선 몸으로 말했음

 

 화산은 피의 가치를 모르는 자들을 위해 피 흘리지 않습니다.

 

 이 대사 하나로 현재의 화산함은 과거의 화산함에 비해 조금 더 고민하고, 더 나아가 주인공 청명에게 또 다른 시야를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제일 손에 꼽는 장면이라 설명한 백천은 그 어린 심사위원이 구석에 무언가 적는 것을 볼 수 있었음

 

 

 

 

 

 

 4. 청명 역이 없잖아!!

 

 작가 청자배...... 그러니까 본명 '청명'은 배역별로 정리한 이력서를 집어던졌음. 물론 아주 못써먹을 개발 연기도 있었지만 조금 더 다듬으면 충분히 쓸만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다른 배역에 지원한 이들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기에 오히려 주인공같은 중요한 역할을 맡겼다간 영화가 전체적으로 개판나겠다 싶어 짜증이 난 터였음. 청명 자신도 놀란 일이었지만, 모든 배역에는 마치 그 배역만을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이들이 하나씩 있었고, 덕분에 거의 만장일치로 배역이 결정되었음. 오로지 단 하나, 주인공 '청명'만이 미정인 상태였음. 당장 내일이면 캐스팅 발표 해야하는데 이게 무슨..... 제작사는 물론이거니와 감독들, 심지어 출판사의 편집자까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지만 아무리 봐도 적합한 캐스팅이 없었음.

 

 대체 왜! 이거 하나 제대로 못하는건데에에에에!

 처, 청명아 진정해라!

 이게 진정할 일이야, 청진 형?

 

 청진, 그러니까 '꽃 피는 산'의 편집자이자, 작가 청명의 친형인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제 동생의 입에 사탕을 물려줬음. 물론 청명보다 더욱 더 작품에 대해 고민했던 청진이 보기에도 적합한 사람은 없었지만, 어찌 현실이 이상처럼 돌아가던가. 청진은 그래도 청명보단 조금 더 나이가 많았고, 그만큼 현실과 타협할 줄 아는 사람이었음. 개중 그나마 나은 사람으로 점찍고 넘어가자며 한참을 달래고 있을 떄.......

 

 ...... 다.

 ..... 응?

 차라리 내가 한다고!!

 

 그렇게 온갖 발작을 다 일으키고 있는 청명에게, 뒤에서 보던 디렉터가 슬쩍 청명에게 몇몇 장면들을 지정해줌. 청명은 작가답게 그 모든 장면을 알고 있었고, 정말 놀랍게도 그 모든 대사와 행동을 한치의 묘사에 어긋남 없이 해냄. 청진은 다시금 깨닫고 맘.  아 맞다. 내 동생, 천재였지.

 

 그렇게 다음날 확정된 캐스팅 배역, 청명 역할의 이름엔 '청명'이 적히고 맘

 

 

 

 

 

 5. 처음..... 뵙는거 맞죠?

 

 백천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음. 자신이 붙은 것은 정말 천운 중의 천운이라 쳐도, 설마 '그 5인방'이 모두 같은 학교에서 나올 줄이야. 심지어 다들 저와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넣은 배역에 선정되는 바람에 커뮤니티에선 이름보고 뽑았냐는 비난이 나오기도 했음.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캐스팅 된 배우들의 면접 영상이 공개된 뒤로 연기력이나 인지도에 대한 이야기는 쑥 내려갔음

 

 그렇게 대본이 전달되고 계약서에 서명을 마친 뒤, 처음으로 배역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음. 소설 화산은 굳이 나누자면 크게 2가지 파트로 되어 있었는데, 청명이 태어나고 처음으로 감정을 익혀나가자마자 첫 전쟁을 겪고 소중한 이들을 모두 잃어버리는 1부, 그리고 100년 후 기적적인 확률을 뚫고 소형함에서 새 신체로 눈을 뜨며 시작되는 2부였음. 그 사이 100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있는 탓에 1부의 인물들과 2부의 인물들은 사실 거의 만날 일이 없었고, 특히나 1부의 인물들은 2부에서 회상으로나마 간간히 등장하지만 2부의 인물이 1부에 얼굴을 비출 일은 없었음. 애초에 1부를 찍는 중간중간 회상 장면만 따로 찍어 편집하는 것이 효율이 더 좋으니 아마 1부와 2부의 배우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인사할 일은 거의 없을 것임.

 

 더 놀라운 점은, 1부와 2부의 분위기와 걸맞게 배우들의 커리어도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는 점임. 1부의 인물들은 제일 젊은 것이 당보 정도였고, 그 또한 이미 세계적으로 인지도를 쌓고 있는 배우였음. 중년간지의 정점이라 불리는 청문은 물론이거니와 그 외에 다른 이들 또한 얼굴 한 번은 보았을 배우들이 대다수. 반대로 2부의 인물들은 백천을 비롯한 학생들이나 무명배우들이 대부분이었음. 그나마 나이가 제일 많은 것이 '승려호'의 함장 법정 정도였고, 이 또한 오랜 무명생활 끝에 겨우 전작의 드라마에서 조연급을 이름을 알린 것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커리어였음

 

 그런 점에서 주인공 청명 역의 청명, 그러니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작가 본인이기도 한 그는 참 특이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제 막 등단한 신인 작가로서도 너무 어린 미성년자(고등학생이었다)이면서 다른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시하고, 또 작품의 해석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잡아줄, 어찌 보면 세트장의 실권자라고 볼 수도 있었음. 오늘의 일정은 리딩만 잡아둔 상태였으나 단 한 마디, 허투루 넘어가는 개그씬에서도 청명은 배우들이 명확한 이해 없이 연기하는 것을 재빠르게 캐치해냈고, 이 대사와 장면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해댐. 경력 있는 이들은 그게 얼마나 귀중한 피드백인지를 알기에, 그리고 경력 없는 이들 또한 그 요구에 완벽하게 부합하고 싶은 욕심에 의욕을 불태웠고, 그렇게 화산은 촬영을 시작하게 됨.

 

 배우들끼리를 제외하고는 분명 면식이 없는 사이일텐데 이상하리만치 촬영장 분위기는 좋았음. 은근히 말로 상대 멕이는 데에는 선수라는 당보나 청문은 물론이고 2부의 화산호에서 함장 역할을 하고 있는 현종이라던가 평소에는 깝죽대는 것이 일이던 조걸 역시 촬영장에서 잘만 어울려 다녔음. 오히려 다들 전에 만난 적 있는지 서로 물어보고 싶어하는 눈치였을 정도로. 어쨌든 그들 중 일부는 프로였고, 나머지 일부는 프로를 노리고 있었기에 서로를 적대시해봤자 좋을 것이 없었음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물이고, 안드로이드라는 설정까지 붙어있는 청명은 실제 복장보다는 초록색 쫄쫄이에 센서를 달고 있을 떄가 많았음. 배경 또한 적당히 스티로폴로 만든 소품이나 초록 배경을 깔고 있었기에 연기에 몰입해야 하는 입장으로서는 최악이었지만, 그럼에도 배우들은 물론 카메라, 음향, 메이크업 담당 모두가 최선을 다해 영화를 제작해나감.

 

 촬영에만 1년, CG 작업과 편집에만 다시 1년. 2년 뒤, '꽃 피는 산'은 드디어 첫 개봉 시사회를 열게 됨

 

 

 

 

 

 

 6. 직접 찍어오느라 고생 좀 했지

 

 '함장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안드로이드이고, 부서지면 다시 수리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함장님을 비롯한 화산호의 사람들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생체 신호가 멈춰버리면 그저 유기질 덩어리일 뿐인.'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청명아, 너는 우리와 함께 어울리면서 그 모든 것을 그저 메모리에 전기 신호로만 남겨두었느냐? 그 신호 이외에, 무언가 다른 시그널이 발생하지 않았더냐?'

 '........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생길 때마다, 한 구석에 더미 데이터가 쌓이고 있습니다. 청진 수석 엔지니어에게 부탁해서 오류를 수정할 예정이었습니다만.'

 '더미 데이터라. 너는 그걸 그리 표현하는구나.'

 '그렇습니다. 이 데이터를 인식하면 제 몸이 논리적 판단에 따른 컨트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치명적인 오류로 판단됩니다.'

 '하하. 그렇다면 우리가 성공한 모양이구나. 청명아, 그 데이터는 말이다-'

 

 대체 왜 마지막 순간에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지. 청명은 끝까지 죽음에 당당히 맞서던 자신의 창조주들을 떠올림. 모선에 접근하고 있음을 알자마자 그들은 화산호에 침투했고, 컨트롤 룸을 장악하려 했었음. 그에 전투원도 아닌 이들이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그를 사수했고, 그 제일 앞에는 전투형 청명이 그들의 적을 상대했음. 그러나 결국 문은 뚫렸고, 청명의 시스템이 잠시 꺼졌다 재부팅되는 3분 사이에 그 안의 인간들은 몰살당했음.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한 그것들은 자동 항해 모드로 시스템을 바꿨고, 청명은 다리가 망가진 몸체를 억지로 끌고 와 함장의 자리에서 전선 몇 개를 뽑아다 팔뚝에 연결함. 자동 항해 시스템은 장애물이 있으면 피해가도록 되어 있으니, 억지로 권한을 끌고 와서 냅다 부딪히는 방법밖엔 없었음.

 

 아직도 그 떄 죽어간 이들의 표정이 생생한데, 그나마 다행이라 여겼던 것은 자신이 마지막이었다는 것일까.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음. 1인용 비상정을 이용해 탈출하는 화산함의 승무원들을 하나하나 챙기고 나자, 마지막으로 백천의 함만이 남았음. 지난 번과는 다르게 외계 생명체의 모선에 직접 올라타 벌인 전투. 부상자는 많았으나 사망자는 없었고, 다행히 화산함을 돕고자 모인 수많은 함선들이 탈출하는 승무원들을 구조하고 있었음. 백천은 우주로 사출되는 순간까지 청명 또한 곧 나올 것이라 믿었음. 방향을 잘못 잡는 바람에 남들보다 한참을 늦게 구조된 뒤에도 청명이 나오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을 떄까진.

 

 청명은 탈출하지 않았음. 지난번에도 그리 어설프게 일을 마무리했다가 반파된 우주선을 수복해 100년이 지나 다시 일어난 놈들이니, 이번에야말로 뿌리를 뽑아야만 했음. 우주선에 기록된 내용을 보아하니 이 함이 진정 마지막으로 남은 '마교족'의 거주지였고, 이것을 정리하는 것은 100년 전 함장 청문이 맡긴 마지막 임무였음. 청명은 마지막으로 백천이 구조되는 것을 보며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줌. 청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뒤늦게 알아챈 그들은 들리지 않을 거리에도 목놓아 청명을 불렀지만, 청명은 말 없이 조종간에 손을 얹음. 마침 근처에 태양과도 같은 별이 있으니 뒷처리는 쉬울 터.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나마 지성이라는게 좀 있는 마교족의 수장은 그런 청명을 보며 그를 인정하는 것 같은 말을 하곤 눈을 감았음.

 

 '내가 지구를 떠나기 전에 살던 고향은 말이다, 과수원을 했단다."

 '그렇습니까?'

 '매실 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봄만 되면 꽃이 만개한 것이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근처에 험악한 바위산이 하나 있었는데, 그런 험지에서 어떻게 자라났는지 모를 나무들에서도 꽃이 활짝 피어났단다. 그 모습이 마치 산에서 꽃이 핀 것 같았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우주에서 사는 시대이지만, 우린 여전히 사후세계를 믿는단다. 아니, 믿고 싶다는 말이 정확하겠지. 이 넓디 넓은 우주에서 서로의 생사조차 모르고 스러져가지만, 그 뒤엔 그리도 행복했던 그 산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 믿는거란다.'

 '.........'

 '그 자리에 너도 있었으면 좋겠구나, 청명아.'

 '저는 안드로이드입니다. 저에게 기동 전 기억이 없듯 기동을 마치고 난 이후의 자아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인간이 아니기에 인간들이 말하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 하지만 청명아, 네가 극구 부정했던 감정을 결국 받아들였듯, 나는 너에게 분명 영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단다.'

 

 "....... 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청문 함장님. 저에게도 영혼이 있다면, 그 꽃 피는 산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요."

 

 임무 완수. 청명의 마지막 메모리에 남겨진 기록이었음. 마교족의 함선은 그 흔적조차 건질 수 없도록 불타올랐고, 일상용으로 제작된 청명의 몸체와 그 안의 회로 또한 새카맣게 타 버린 지 오래. 과거 화산 특유의 기술력으로 만든 회로였기에 대체품 또한 없었고 청명 또한 자신의 백업 파일을 만들어두지 않았기에 다른 안드로이드의 몸으로 청명이 툭 튀어나올 일은 없었음

 

 새 함장이 된 백천은 담담히 좌표를 읊음. 최근 들어 텃세가 심해지고 있다는 구역이었음. 두 번의 혼란을 거치며 대우주시대는 안정기에 접어들었고, 제대로 된 법과 제도가 들어서면서 아무리 자경단의 역할을 한다지만 무법자에 가까웠던 대형 함선들은 점차 자취를 감추거나 공식적으로 해체를 표명했음. 화산함 또한 응당 그리 되어야 할테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청명이에게 배운 것이 아니냐."

 "Aye Aye Sir, captain!"

 "걸아 시끄럽고, 지난번처럼 좌표 틀리지나 말아라."

 

 그렇게 화산함은 유유히 목적지를 향해 다시 박차를 가하며 우주 어딘가로 사라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화면은 암전되었음.

 

 시사회 참가자들은 다들 크레딧이 다 올라갈 떄까지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었음. 몰입도 높은 구성,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 적절하게 삽입된 회상씬까지. 장장 3시간에 달하는 길이였음에도 누구 하나 지친 기색 없이 영화에 빠져들었고, 소설을 영화화하는 가장 완벽한 방법을 보여준 제작진들에게 경의를 보냈음. 그리고 엔딩 크레딧이 끝날 무렵, 갑작 화면이 밝아지기 시작함

 

 색색의 꽃이 만발한 들판이었음. 언덕 어디께에서 난생 처음 보는 색채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한 아이가 이내 고개를 들어봄. 그 앞에는 아무리 봐도 바위로만 이루어진 산이 높게 솟아 있었으나, 놀랍게도 곳곳에 피어난 꽃나무가 예쁘게 산을 단장해주고 있었음. 아이는 산을 향해 홀린 듯 걸어가다, 발걸음을 빨리 하다, 이내 달려가기 시작함. 양 옆으로 많은 꽃들이 흩날렸으나 아이는 오로지 앞을 향해 달렸음. 그리고 이내-

 

 '청명아, 어서 오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아이를 반겨주고 있었음. 아이는 잠시 멈췄다가 이내 활짝 우스며 그들에게 양 팔을 뻗어 제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냈음

 

 '화산함 제 5세대 안드로이드 청명, 임무를 완수하고 지금 복귀했습니다!'

 

 

 

 

 

 

 7. 분명히 픽션인데 말이죠

 

 전혀 픽션같지가 않았단 말이죠.

 무슨 소리를......

 

 당보, 그러니까 '꽃 피는 산' 영화 중 주인공 청명의 친구 안드로이드 '당보'역을 맡았던 배우이나 청명의 찐팬이던 그는 버블티를 밀어주면서 고민을 말함. 배우가 역할에 몰입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진정한 자신이 아니기에 마음속 한 구석에서는 마지노선이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그런데 이상하게 이 영화를 찍는 동안은 자신이 진짜 안드로이드 당보가 된 것처럼 진지하게 몰입했고, 덕분에 자신의 촬영이 끝난 이후로 이상하게 허전하면서도 후련한 느낌이 들었다고 고백함. 청명은 심드렁한 반응이었는데 그도 그럴게 이 영화에서 주, 조연을 맡았던 인물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이야기를 했기 떄문임. 호접몽에서 깬 기분이라고 할까, 자신이 그 역할인지 아니면 그게 자신의 전생이었는지 의심하는 이들까지 있었음

 

 어쩄든 영화는 대박을 쳤고,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이름값을 거하게 올려놨으니 여기 있는 당보 또한 곧 스케쥴에 사로잡혀 이렇게 대화하고 있을 시간은 없을 터였음. 그걸 알기에 청명 또한 군말없이 따라나온 것이고. 이내 당보는 청명에게 케이크 두 조각을 포장해 들려준 뒤 매니저를 따라 또 다른 촬영지로 향했음

 

 하, 눈치 빠른 놈들

 

 청명은 그리 중얼거리며 자신의 자취방으로 향했음. 소설은 물론이고 영화까지 히트를 친 판에 온갖 회사에서 드라마화니 게임이니 캐릭터 상품이니 하는 제안이 들어왔지만 모두 다 거절했음. 목적은 이미 이루었기에.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벌인 일이라기엔 너무 거창하긴 했지. 근데 내 전생 이야기를 트렌드 맞춰서 SF로 바꾼게 이렇게 인기가 좋을 줄은 몰랐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청명은, 자취방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형 청진과 백부 청문이 기다리고 있을 본가쪽으로 목적지를 바꾸기로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