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귀환] 보고 싶은 망상 하나
* 매화신 청명이와 구화산, 신화산 이야기
1. 화산의 매화는 지는 법이 없어 사시사철 그 향기를 유지하더라
- 라는 말, 비유 아니었어?? 분명 시기상으로는 10월인데 한창 만개한 매화를 보며 청문이 어리벙벙하게 주변을 둘러 봄. 사숙 되실 분들께선 '우리도 그랬지' 하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고, 장로들은 매년 봐도봐도 신선한 반응이구먼 허허 하며 구경할 뿐. 13대 청자배를 받는 일을 맡게 된 무각주는 곧 청자배 대사형이 될 청문에게 화산의 신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자며 화산 뒤쪽으로 난 가파른 길로 안내함.
화산의 사람이 아니면 다니기 힘들 정도로 위험천만한 길을 10대 초중반이나 되었을 청문이 걷기는 힘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장로님의 뒤를 바지런히 쫒아 오른 곳엔, 척 봐도 주변의 매화들과는 격이 다른 거대한 고목이 화려하게 피어 있었음. 참 특이하게도 한 나무에서 백매와 홍매가 동시에 피어 있는, 그런 고목. 장로는 미리 챙겨온 백자 병 하나와 각종 과실을 꿀에 담근 과일청을 매화나무 앞 넓다란 바위 위에 올려놓더니 가볍게 포권하며 말함
10대 제자 ㅇㅇ이 13대 제자 될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그 순간 청문은 눈을 의심했음. 어느새 나타난, 끽 해야 10살이나 되었을 어린아이가 병 뚜껑을 따고 시원하게 마시고 있었기 때문임. 내용물은 암만 봐도 술(도문에 술 있는게 괜찮나 싶었지만 다 생각이 있으시겠거니 하고 넘김)인데 꼴꼴 잘만 마시고, 과일청도 내용물 쏙쏙 뽑아먹던 그 아이는, 병이 다 비워질 때 쯤에야 고개를 돌려 인사를 받아줌.
와. 13대? 너넨 진짜 빨리 지나가는구나. 저기 전각 짓고 화산파 개파하면서 3대 제자 받겠다고 허락 받으러 온 게 어제같은데.
......? 3대요? 아니, 개파식요?? 대체 이 아이, 몇 살인거지 그럼?? 그런 의문은 아이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인이라 젊어 보이는 장로의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음.
그래, 알았어. 가 봐.
어쩐지 그 표정이 좀 씁쓸해보였던 청문은, 결국 제자 입문이 다 끝나지 않아 뒤숭숭한 틈을 타 몰래 그 아이를 다시 만나러 가게 됨.
2. 난 여기 박힌 돌이고, 너희는 굴러들어온 돌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 아이는 화산파가 세워지기도 전부터 화산에 자리잡았던 매화의 신이었음. 매화가 심어지고 태어났는지, 아니면 자신이 화산에 자리를 잡았기에 매화가 나타난건진 기억나지 않는다 말한 아이는 청문이 집을 나설 때 간식으로 받아왔던 월병을 우물우물 씹으며 청문의 질문에 그럭저럭 성실히 대답해주고 있었음. 개화에서 자연의 순리를 찾고자 했던 화산파의 개파조사가 그 섭리를 가까이서 관찰하고자 화산에 자리를 잡으려 했고, 자연스레 화산의 주인이었던 아이에게 허락을 받으러 왔으며, 화산의 이름을 짊어진 이상 그 이름에 걸맞는 선을 지킬 것을 조건으로 하여 한구석을 내줬다는 것이 그 아이의 설명이었음.
아이는 이름이 없었음. 그냥 처음부터 그 곳에 존재했던 신이었기에 딱히 이름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붙여줄 사람도 없었으니. 화산의 어른들도 아이를 매화신이나 화산신같은 칭호로 불렀음. 감히 신의 이름을 인간이 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이는 화산의 매화가 지지 않도록 지키고 있으면서, 그 가호 아래에 있는 화산파 사람들을 남몰래 돌보기도 했음. 그럴 필요 없다 일렀는데도 화산에서는 큰 행사나 소란스러운 일이 있으면 꼭 아이에게 보고를 하거나 허락을 받으러 갔고.
그렇게 청문은 가끔 장로들 몰래 아이를 만나러 갔음. 입으로는 필요 없다 하지만 달달한 간식을 챙겨가면 눈에 띄게 표정이 밝아졌으니, 아이가 청문을 내치지도 않았음. 오히려 어느 순간부터는 청문이 다니기 편하도록 길을 좀 더 다듬어주기까지 했음. 덕분에 청문은 아이를 만나러 가다 사제 청진에게 들키기도 했고, 13대 청자배 아이들은 다들 아이와 안면을 트게 되었음
3. 어떤 새끼야?
청문의 얼굴에 시퍼렇게 든 멍을 보면서 아이가 말함. 잠시 뜸을 들이던 청문은 굴렀다던가 하는 변명이 통하지 않을 걸 알곤 사실대로 고함. 사숙조의 심부름을 받아 길가던 중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다른 사람과 부딪혔는데, 하필 화산과 사이가 좋지 않은 종남의 사람이었고 그 길로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었다고. 말이 싸움이지 입문한 지 고작 반년 된 아이와 딱 들어도 최소 이대제자쯤은 될 것 같은 놈이 붙으면 그건 그냥 일방적인 폭행일 뿐임. 청문은 차마 사문에 피해가 갈까봐 아무 말도 못했는데, 그 종남놈은 기세가 등등해져서는 정식으로 사과를 받으러 오겠다고 엄포까지 놓았다고.
알았다.
...... 혹, 이 일로 화산에 피해가 간다면 저는-
어린 애가 쓸데없이 이런거 신경 쓰는거 아니다.
그러면서 고목에 막 돋아난 새순 하나를 톡 꺾어다 상처 근처에 살살 흔들어줌. 가지는 금방 말라비틀어졌는데, 반대로 청문의 상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 그리고는 다른 걱정일랑 하지 말고, 가서 장로 애들한테 조만간 내가 한번 보자했다고 말이나 전하라 함
며칠 뒤, 종남놈은 진짜로 사과를 받겠다며 장로급 하나와 화산을 올랐음. 주눅든 청문은 장로들에게 미안해서 고개도 못들고, 장로들은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반발을 하는데 갑자기 그 인파를 뚫고 종남 이대제자와 장로 사이로 검 하나가 지나감
그래. 사갈새끼도 안할 개소리 잘 들었다. 길가다 애랑 부딪혔으면 둘 다 그냥 사과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지 이걸 또 트집잡아 문파 문제로 키우는 종남 인성도 잘 알았고.
그렇게 모습을 드러낸 아이. 암만 봐도 청문보다 더 작은 아이라 똑같이 13대 아이일거라 생각한 종남 장로는 어르신들 대화에 끼어들었다며 호통을 치는데, 화산 장로들은 깜짝 놀라서 끼어들 틈도 찾지 못함. 평소엔 항상 그 나무 아래에만 계시던 분께서 어찌 여기까지.....! 아이는 청문 등짝을 철써 내리치더니 당당하게 말함.
뭘 잘못했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어? 끽 해야 둘 중 하나 멸문하면 그만인 문제인데!
.....? 네? 멸문이요??
거기까지 가자 종남에서 얼굴이 창백하게 질림. 자기들이 하는 말이 억지인 것도 아는데, 만약 화산이 똑같이 억지를 부려 문파간의 전쟁까지 고려하고 있다면? 둘 중 하나 멸문이라곤 하지만 십중팔구 그 날로 종남은 무림에서 이름 지워야 함. 결국 화산의 저력을 알고 있는 종남 장로가 재빠르게 고개 숙이고, 이대제자도 억지로 꺾어둔 뒤 돌아감. 그 모습을 뒤에서 보다 쯧쯧거리던 아이는, 화산 장로들에 호통을 침
내 가호를 받는 너희가, 고작 저깟 아해에게 고개숙일 일을 만드느냐? 얼마나 화산이 얕잡아 보였으면 이런 일을 만들어?
..........
진정으로 잘못한 일이라면 인정하고, 사죄하고, 수습해라. 그게 아니라면 그 누구에게도 숙이지 말라. 그게 나, 화산의 매화신이 인정한 문파로서의 의무다.
그리곤 장문인을 따로 불러다 슬쩍 이름. 적당히 문적에 자기가 있을 신분 하나 만들어두라고. 앞으로 이런 일이 자주 있을 것 같아 두는 대비책이라며. 그리하여 13대 제자들의 문적 맨 끄트머리에 '13대 제자 청명'이라는 도호로 매화신은 남겨지게 됨.
4. 너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빨리 떠나는구나
13대 제자 중 첫 희생자가 나왔음. 마교의 동태를 파악하겠다며 각 문파에서 차출된 수색대가 전멸하며 생긴 일이었음. 그간 13대 제자로서 활동하며 가아끔 모습을 드러냈던 청명은, 지푸라기로 만든 거적에 싸여 돌아온 시체를 보며 중얼거렸음. 지금껏 화산에 부상자가 생기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음. 오히려 팔을 잘리거나 내단에 상처를 입어 다시는 무인으로서 활동할 수 없는 자들도 있었음. 그러나 진정으로 죽어서 돌아온 것은 처음이었기에 청명은 조용히 장례를 준비하는 청문 옆에 서서 모호한 표정을 지었음
이게 그 마교라는 놈들의 짓이냐.
....... 네.
........ 한낱 인간을 신으로 여기더니, 그 하는 짓이 참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청명은 지금까지 큰 싸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음. 신이 인간끼리의 싸움에 개입하는 것은 폄적의 사유가 될 수 있었기에 자칫하면 신의 작위를 박탈당할 수 있었기도 했고, 어차피 인간들 사이의 일이기에 스스로가 잘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떄문이기도 했음. 하지만 화산과는 달리 다른 문파들은 그들을 막을 실력도, 힘도, 의지도 없었으며 오히려 남에게 떠넘기기에만 급급했음.
차라리 잘 되었어.
네?
그놈이 진정으로 신의 영역에 걸치고 있다면, 내가 개입할 정당한 사유가 되기 마련이니.
화산의 13대 제자 청명이 정마전쟁에 참전하는 순간이었음.
5. 우리가 기억하면 되는게지요
청문은 청명에게 엄청난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음. 저들이 모자라 신이 직접 피를 묻히게 했다는 생각과 함께, 잔정 많은 매화신에게 수없이 많은 이별을 남기고 만 것. 처음 청명을 만났을 때 동행했던 장로를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은 것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음. 그 이후로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장로는 등선했으니까. 수백년을 살아온 매화신에게 인간의 삶은 너무나 짧고 한순간에 스쳐 지나가는데도, 그 모든 것에 조금이나마 마음 한구석을 내주다보니 여전히 이별을 싫어할진데 이리도 갑작스레 사라져버리는 화산의 아해들을 두고보지 못해 직접 검을 든 화산의 신께 어찌 사죄를 해야 할지.
한 때 젊은 치기에 당당히 말했던 것을 취소하고 싶은 심정이었음. 시간이 흘러 전각을 차지하는 이들이 바뀐다 해도, 그들이 청명을 기억하고 청명이 우리를 기억하면 괜찮지 않겠냐는 그 말. 어린애가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한다며 쥐어박히긴 했어도 그럴지도 모른다며 웃어 넘기던 그 때를 기억하며, 결국 청명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못하고, 청명 홀로 이 모든 이들을 기억하겠구나 싶어 청문은 비통하게 눈을 감았음
그래도 그들의 신이, 매화검존이 그 오만한 천마의 목을 베어주리라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은 채.
6. 난 니들 다 싫어
어차피 약속은 지키지도 못하는, 빨리 죽는 놈들.
너희가 나를 기억하고 내가 너희를 기억하면 된다고? 그래서, 지금 여기 아해들 중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지?
너도 마찬가지다 당보 이새끼야. 뭐? 술친구? 전우? 몸은 하난데 지킬건 섬서에 하나 사천에 하나를 만들어버린 놈이, 지 멋대로 약속이라고 도장찍고 무덤에 숨어들어간 놈을 내가 뭐가 이뻐서?
난 더 이상 너희 안 믿어. 죽으러 가는 길에 하하호호 웃으면서 희망찬 미래 이야기 하는 것도 싫고, 그 안에 당연하게 날 끼워넣는 것도 싫어.
그 아해들을 기억하지 않는 구파일방은 증오해. 하지만 그 후손인 너희마저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 더 원망스러워.
검으로 꽃 피우겠다며 찾아온 개파조사한테 정신 팔릴게 아니라 그냥 등선해버렸어야 했는데, 너희가 대체 뭐가 이쁘다고 쓸데없이 정만 들어선 이 땅에 묶여야만 하는데?
그러니까 나도 이젠 나 혼자 살거야. 100년 전 전쟁에 개입한 죄로 얽힌 저주가 끊어지는 날, 더는 미련 없이 화산을 떠날거라고.
그리 말하는 청명이의 눈엔, 그간 참아왔던 온갖 감정이 흘러 넘치고 있었음.